세계의 공업화와 무역
약 1만년 전 '동무르이 가축화' 및 '식물의 작물화'로 시작된 농업문명사회로부터 공업문명사회로의 이행을 '공업화'라 부른다. 공업화는 무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1540~1640년의 초기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석탄을 대체에너지로 가정용과 공업용 연료로 이용하는 데서 촉발되었다. 석탄 생산의 증가로 관련 기술개발의 필요성이 증대되었고, 마침내 1781년 제임스 와트가 동력기계인 증기기관을 발명하면서 급속하게 산업혁명이 진행되었다.
영국의 공업화 이후 전 세계로 파급되어 19세기 들어 먼저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이, 뒤이어 미국이 각각 공업화 되었다. 19세기 들어 먼저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이, 뒤이어 미국이 각각 공업화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는 일본과 러시아가, 그리고 20세기 중반과 후반에 이르러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까지 연쇄적으로 공업화되었다. 특징적인 것은 공업화가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사실상 영국뿐이고, 후발 여러 나라의 공업화는 국가의 적극적인 산업정책 내지 무역정책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점이다.
산업혁명은 국제관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 왔다. 유럽 여러 나라는 16세기부터 다른 지역으로 정복하여 식민지로 삼아 18세기 중엽까지 금, 은의 강탈과 노에무역을 중심으로 식민지를 수탈하였다. 그러나 산업혁에 따라 식민지를 원료의 공급지 및 공업생산품의 시장으로 삼게 되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영국의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으로도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정치적 변화로 주목할 만한 것이 산업 부르주아의 발흥이다. 이들은 고전경제학파의 자유방임주의를 이데올로기로 삼아 중상주의적 각종 규제의 철폐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 결과 19세기 전반부터 각종 규제가 차례로 폐지되었다. 그중 무역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이 동인도회사의 무역특권 폐지, 곡물법폐지, 항해 조례페지 등이다.
다른 한편 자유무역의 실현은 1824~1825년의 허스키슨 개혁에 의해 시작되었다. 1840년 필 개혁에서 원료에 대한 관세의 최고 한도를 5%, 반가공제품은 12%, 가공제품은 20%로 하였고, 1845년에는 원면의 수입관세를 전면 폐지하였다. 뒤이어 1850년대의 관세인하를 거쳐 1860년에는 보호관세와 차별관세 등이 거의 전면 폐지되었다. 나아가 영국은 다른 나라의 무역자유화도 적극 요구하여 1860년의 영국-프랑스 통상조약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여 자유주의 경제체제가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와 같이 한 나라가 공업화 하고, 산업이 발전하게 되면 국제통상에서 보다 자유로운 무역을 추구하는 것은 다른 나라의 사정에서도 비슷하다.
독점자본주의의 등장과 식민지쟁탈전
1860년대의 무역자유화 기운도 잠시에 그치고 19세기말 장기적 불황이 일어나자 카르텔, 트러스트 등의 독점적 기업결합과 기업의 흡수합병이 확대되어 소수의 거대기업에 생산과 자본이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산업혁명 이후 널리 사회에 축적되어 온 유휴자금을 동원하여 내부이윤의 한계를 넘어선 기업규모의 확대를 가능하게 한 주식회사 제도가 이러한 집중의 주요 수단이었으며, 융자업무와 함께 주식발생을 담당한 은행이 주요 기관이었다. 생산부문과 금융부문의 자본적 결합에 임원 등 상호 인적결합이 가세하여 거대산업자본과 거대 은행자본의 융합이 진행됨으로써 독점자본주의가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독점자본주의는 해외로 영토를 확장하고 이를 식민지화하는 제국주의와 결합되어 유럽 열강은 다투어 해외영토 획득에 나섰다. 뒤따라 미국과 일본도 이에 참가하여 전 세계에서 경쟁하게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세계 각국의 자본주의 경제가 독점단계에 들어서자 제국주의 열강들은 자국 상품의 판로와 원료공급지 획득을 위해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전개한 것이다. 세계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선진제국주의 국가들과 뒤늦게 영토분할에 뛰어든 후발제국주의 국가들간의 대립은 세계 곳곳에서 격화되었으며 국지전도 빈발하였다.
결국 1914년 6월 발칸지방에서 시작된 전쟁은 불과 일주일만에 유럽 전역을 전쟁에 휩싸이게 하였다. 처음으로 전 세게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제1차 세계대전이 4년만인 1918년 종결되면서 승전국인 영국이 주도하여 구축한 베르사유 체제는 패전국 독일에 가혹한 것이었다. 영국의 식민지는 제외하고 독일의 식민지에는 민족자결이 인정되어 독립을 보장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제1차 세계대전 후 형성된 국제질서에 대해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이, 말하자면 지구상 자원의 재배분을 요구하며 일으킨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역시 식민지의 쟁탈을 의도한 침략적인 성격의 제국주의전쟁이다. 다만, 제1차 세계대전이 우연한 요소에 의해 촉발된 우발적 성격을 지닌 반면,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가 각각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획하여 도발한 전쟁이라는 점이 다르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으로 시작되어 6년만인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료된 제2차 세계대전은 전사 및 민간인 희생자 약 5,000만명이라는 인명피해와 직접전비만도 당시 환율기준으로 미화 약 1조1천억 달러 이상이 소요되었다.
전후 국제무역환경의 변화
수많은 희생 끝에 1945년 종결된 제2차 세계대전은 국제질서에 큰 변화를 자겨왔다. 가장 큰 변화는 미국과 소련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것과 그 동안 식민지로 있던 수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독립한 것이었다. 반면 영국은 승전국이었지만 막대한 전비부담으로 종전의 위세를 잃고 유럽의 한 개 강국 수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높아진 소련의 위상과 동유럽제국의 공산화, 1949년 중국대륙의 공산화, 1950~1953년의 한국전쟁, 1946~1975년의 베트남 전쟁 등으로 동서냉전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세계시장은 1980년대 말 소련이 와해되고 동유럽제국 및 중국이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할 때까지 자유주의 시장경제국들과 사회주의국들로 양분되어 사실상 독자적 경제영역으로 구분되었다.
자유주의시장경제국들의 주도권은 전후 초기단계에서는 압도적으로 미국에 있었다. 승전국이나 패전국을 막론하고 다른 나라는 미국 제품을 수입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전후의 국제경제질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이전인 1944년 7월 미국의 주도로 44개 연합국이 미국 뉴 햄프셔주의 브래튼우즈에서 공동선언 형식으로 발표한 브래튼우즈 협정의 성립으로 마련되었다. 이 협정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만연하였던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것으로 다자주의를 기본으로 한다. 무역문제에서 다자주의는 국가 간 협력 촉진을 위해 범세계적 협의체를 두고 규범·절차를 만들어 이를 준수하도록 하자는 접근방식을 말한다.
전후 국제경제질서는 브래튼우즈 협정에서 확약한 IMF, IBRD, GATT라는 3개의 기둥 위에 세워지게 되었다. 그 중 IMF와 GATT가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므로, 전후 시장경제국가들의 세계경제체제는 IMF-GATT 체제라 불리게 되었다. 무역과 관련하여 브래튼우즈 체제 발족당시 참여하였던 50개국에 의해 구상되었던 보다 구체적인 계획은 국제연합의 특화된 기구로서 국제무역기구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ITO초안은 매우 야심찬 것으로 단순한 세계 교역의 규율차원을 넘어 고용, 상품협정, 제한적 기업관행, 국제투자 및 서비스 등에 관한 규범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1948년에는 ITO를 구체화하는 국제무역기구헌장까지 조인했으나, 그 내용이 지나치게 자유무역주의 이상을 반영했다는 이유로 이 헌장은 제안국인 미국을 비롯 영국 등 주요국의 의회비준을 얻지 못함에 따라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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